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어느 날 카프카의 소설을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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왜 그의 이야기 속 방들은 서로 이어지는 방식이 그렇게 예측할 수 없는가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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계단과 복도가 아니라, 아무 데서나 뚫려 있는 구멍처럼 이어지는 공간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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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쉽게 떠나지 않았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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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때부터 리좀이라는 개념이 궁금해졌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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들뢰즈와 가타리의 『천 개의 고원』을 제대로 읽어보고 싶었고, 유진 홀랜드가 쓴 이 안내서를 집었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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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장을 읽기 전까지는 리좀을 단순히 ‘중심 없는 네트워크’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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나무처럼 뿌리가 있고 줄기가 뻗어 나가는 구조가 아니라, 평평하게 퍼지는 어떤 연결이라고요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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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런데 카프카를 통해 설명되는 리좀은 그보다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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더 구체적이었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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카프카의 세계에서 공간은 위계적인 건물이 아닙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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방과 방이 예상치 못한 문과 통로로 이어지고, 그 통로들은 언제든 새로 생기거나 막힐 수 있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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관료제도 마찬가지입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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겉으로 보이는 조직도는 고정되어 있는 것 같지만, 실제 권력은 그 조직도를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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누가 누구에게 실제로 말을 걸고, 정보를 주고받는가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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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 살아 있는 통로에서 권력은 작동합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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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책은 리좀을 바로 그런 이미지로 제시합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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중심에서 가지를 뻗는 나무가 아니라, 어디서든 어디로든 이어질 수 있는 굴과 지도에 가깝다고요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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처음에는 이 설명이 조금 불편했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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우리는 보통 생각을 정리할 때 큰 개념 하나를 중심에 두고 아래로 펼쳐 나가는 방식을 배워왔으니까요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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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, 그 방식이 오히려 사유를 가두는 경우가 많다는 걸 느꼈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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특히 글을 쓰거나, 복잡한 주제를 공부할 때 목차를 먼저 만들고 그 안에 내용을 채워 넣으려 하면, 정작 중요한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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연결이 보이지 않더군요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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카프카가 제공한 것은 시간적 패치워크가 아니라 공간적 리좀, 즉 통로의 지도였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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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개념이 제게 남긴 것은 한 가지 실험입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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지금까지는 글의 구조를 선형으로 정리하려고 했는데, 이제는 ‘통로’를 먼저 찾아보기로 했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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예를 들어 한 개념을 중심에 두지 않고, 그 개념과 연결되는 다섯 개의 다른 개념을 찾아서 서로 이어지는 지도를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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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려보는 것입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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노트 역시 창고처럼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, 실제로 오가는 길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바꿔보는 중입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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조직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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공식적인 보고 라인보다, 실제로 정보가 흐르는 경로를 따로 그려보는 일이 훨씬 더 유용하다는 걸 깨닫고 있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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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책은 모든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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다만, 지식이 점점 복잡해지고, 한 가지 체계로 정리되지 않는 영역에서 일하거나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의미가 있을 것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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같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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특히 글을 쓰는 사람,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사람, 혹은 자신이 속한 조직의 실제 움직임을 이해하고 싶은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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사람에게요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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계층과 중심을 전제로 한 사고에 지친 사람이라면, 이 책이 제공하는 ‘굴’의 이미지가 작은 균열을 만들어줄 수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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있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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사유는 뿌리가 아니라 굴이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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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한 문장이 지금 제게 남아 있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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다음으로 어떤 통로를 찾아볼지, 그 질문만은 계속 가지고 가고 싶습니다.
