﻿1
00:00:00,000 --> 00:00:05,000
AI로 글을 쓰고 시스템을 설계할 때마다, 나는 자꾸 같은 곳에서 막혔습니다.

2
00:00:05,000 --> 00:00:10,000
기능을 나열하고, 데이터를 쌓고, 노드를 연결해도 정작 중요한 것이 빠져 있는 느낌이었습니다.

3
00:00:10,000 --> 00:00:14,000
그래서 다시 집어든 책이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입니다.

4
00:00:14,000 --> 00:00:18,000
읽기 전에 나는 이 책이 단순히 논리학의 난해한 고전이라고 생각했습니다.

5
00:00:18,000 --> 00:00:24,000
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경계를 훈련시키는 사고 도구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만 있었습니다.

6
00:00:24,000 --> 00:00:28,000
첫 회차를 읽으며 가장 먼저 붙잡힌 문장은 이것이었습니다.

7
00:00:28,000 --> 00:00:30,000
세계는 사물이 아니라 사실이라고.

8
00:00:30,000 --> 00:00:36,000
방 안에 블록이 열 개 있다는 사실 자체보다, 그 블록들이 어떻게 놓여 있는지가 세계를 만든다는 이야기였습니다.

9
00:00:36,000 --> 00:00:42,000
빨간 블록이 파란 블록 위에 있는지, 탑이 무너졌는지, 문 앞을 막고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뜻이었습니다.

10
00:00:42,000 --> 00:00:45,000
처음에는 이 말이 철학적 수사처럼 들렸습니다.

11
00:00:45,000 --> 00:00:50,000
그런데 내 작업을 돌아보니, 정확히 그 반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.

12
00:00:50,000 --> 00:00:56,000
사용자 목록, 버튼 목록, 데이터베이스 테이블 목록을 만들고는 그것이 곧 시스템이라고 생각했습니다.

13
00:00:56,000 --> 00:00:57,000
프롬프트도 마찬가지였습니다.

14
00:00:57,000 --> 00:01:01,000
키워드를 나열하고 예시를 쌓으면 의미가 생길 것이라 믿었습니다.

15
00:01:01,000 --> 00:01:04,000
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사실은 그런 목록이 아닙니다.

16
00:01:04,000 --> 00:01:10,000
어떤 상태가 성립하고 있는가, 그 상태 사이에 어떤 관계가 맺어져 있는가가 핵심이었습니다.

17
00:01:10,000 --> 00:01:15,000
이 관점이 내 노트와 프롬프트에 들어오자, 갑자기 지워야 할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.

18
00:01:15,000 --> 00:01:20,000
노드와 노드 사이에 실제로 성립하는 관계가 아니라, 그저 모아둔 정보들이 많았습니다.

19
00:01:20,000 --> 00:01:27,000
프롬프트 안에서도 “이것을 설명하라”는 명령은 많았지만, “이 상태가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변하는가”를 묻는 문장은

20
00:01:27,000 --> 00:01:28,000
거의 없었습니다.

21
00:01:28,000 --> 00:01:30,000
그래서 지금은 작업을 시작할 때마다

22
00:01:30,000 --> 00:01:32,000
한 가지 질문을 덧붙이기로 했습니다.

23
00:01:32,000 --> 00:01:35,000
지금 내가 다루는 것은 사물인가, 사실인가.

24
00:01:35,000 --> 00:01:37,000
이 책은 그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입니다.

25
00:01:37,000 --> 00:01:43,000
그래서 논리철학논고는 AI와 글쓰기, 시스템 설계 사이에서 길을 잃은 사람에게 특히 필요합니다.

26
00:01:43,000 --> 00:01:46,000
목록을 만드는 일에 익숙해진 사람, 관계를 말하려다

27
00:01:46,000 --> 00:01:48,000
자꾸 사물로 돌아가 버리는 사람에게.

28
00:01:48,000 --> 00:01:50,000
한 문장으로 남기는 독후감은 이것입니다.

29
00:01:50,000 --> 00:01:57,000
세계를 사물의 창고가 아니라 사실의 그물로 보기 시작했을 때, 내가 써야 할 문장과 지워야 할 문장이 동시에

30
00:01:57,000 --> 00:01:58,000
보였다.

31
00:01:58,000 --> 00:02:00,000
다음으로 읽으며 남은 질문은 이것입니다.

32
00:02:00,000 --> 00:02:05,000
내가 지금 쓰는 문장과 코드 가운데, 사실이 아니라 사물을 나열하고 있는 부분은 어디인가.
